감옥 같은 세상에서 살아가기 — 다시쓰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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흔히 세상살이가 지옥에서 사는 것 같다고 푸념하곤 하는데, 지옥의 ‘옥’자가 바로 감옥 ‘獄’이다. 우리는 자유롭게 저마다의 삶을 살아가고 있지만, 자아의 굴레나 가족, 회사, 사회, 국가 등의 범주 안에서 구속되어 살고 있다. 다만 그 속박의 강도가 약하니 언제든지 이기적이거나 간편하게 빠져나옴으로 그 얽매임을 인식하지 못하고 있다. 그런 자신이 어느 날 가늠할 수도 없는 긴 시간을 좁은 공간에 갇히게 된다면 삶은 어떻게 변화할까?
신영복 선생은 41년생으로 스물여덟 살이던 68년 통일혁명당 사건으로 1, 2심에서 사형을 선고 받았으나 대법원에서 무기 징역으로 감형된다. 이 책은 88년 출옥하기 까지 20년 20일의 수형 생활 동안 가족들에게 보낸 편지를 묶어 펴 낸 책이다. 짧은 편지마다 지식인으로서 인신이 구속당한 상태의 인식과 생활, 그로부터의 고뇌, 옥중의 공부, 부모님을 향한 죄송한 마음, 가족을 향한 그리움과 수형생활을 위한 연락들로 가득하다.
나는 “벽 속의 이성과 감정”(238)이라는 글이 가장 인상적이었다. 이 글은 구속된 삶을 잘 설명해 주고 있다. 벽으로 둘러싸인 감옥에서 수형자는 감정적이기 쉬운데 그 이유는 벽이 개인을 한정하고 곧 작아지게 한다고 저자는 말한다. 이러한 시공간의 축소는 이성과의 연결을 사라지게 하고 감정에만 속박 되는 삶을 살게 하지만 감정과 이성은 두 개의 수레바퀴이고 크기가 같아야 한다. 감정을 극복하려면 이 한 축을 억압하는 것이 아니라 다른 한 축인 이성을 계발하여야 한다. 이 말은 감정과 이성 중 하나를 중시해야 한다는 말이 아니라, 낮은 이성에는 낮은 감정이, 높은 이성에는 높은 감정이 관계한다는 의미이다. 이성은 감정에 기초하고, 감정에 의존하여 발전하기 때문에 이러한 노력은 벽의 속박과 한정과 단절로부터 감정을 해방하는 과제와 직결된다. 선생은 이를 위해 징역 속에는 풍부한 역사와 사회가 존재하고 그 견고한 벽 속에는 수많은 사람들로 가득 차 있음을 발견하고 다양한 사건들의 모든 고통, 가난과 갈등을 인정하며, 그 해결에 대한 일체의 환상과 기만을 거부하여 우리의 정신적 자유, 즉 감정에 대립되는 것이 아닌 관계하는 이성을 얻을 수 있음을 역설한다. 사건에 매몰되거나 각자의 감정에 칩거해 들어가는 대신 우리들의 풍부한 이웃에 충실해갈 때 비로소 벽의 위험으로부터 안전해질 수 있다고 말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각자의 사건에 매몰되거나 각자의 감정에 칩거해 들어가는 대신 우리들의 풍부한 이웃에 충실해갈 때 비로소 벽의 위험으로부터 안전해질 수 있으리라 생각됩니다. 바다가 하늘을 비추어 그 푸름을 얻고, 세류를 마다하지 않아 그 넓음을 이룬 이치가 이와 다름이 없다고 생각됩니다.” 너른 세상에서 살면서도 우리는 얼마나 이기적이고 자신에게 매몰되는가? 하지만 선생은 붙들린 감옥에서도 이성과 감정을 뛰어 넘기 위해 주위를 둘러보고 그 속의 사회와 함께 사는 사람들에게 시선을 향한다. 인신의 구속에서 오는 감정의 동요를 오히려 주위를 둘러보아 감옥안의 역사와 사회를 발견하고 그 속의 고통과 갈등을 감내하는 것으로 극복의 첫 발을 내딛는다. 이 거대한 감옥 같은 세상의 우리도 마땅히 그러해야 하지 않을까? 감옥에서의 삶이 축복일리 없겠지마는 자유로운 세상에서 살면서도 속박의 굴레를 떨치지 못하는 뭇 사람들에 비해 선생의 삶과 정신은 귀감이 된다. 진정한 자유로운 정신과 감정의 삶을 생각 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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