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eekly Sage - 11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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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Sage입니다. 2020년도 어느덧 5월이 지나고 6월에 접어들었네요. 시간이 정말 빠르게 흐르고 있습니다. 이번 주에는 아버지 얘기를 해 볼까 합니다.

아버지의 검진

저희 아버지는 올해 75세십니다. 오랫동안 전기엔지니어로 일하시다가 제가 대학원 다닐 때즈음 공기업을 퇴직하시고 이런 저런 개인사업을 많이 하셨습니다. 정말 여러가지 위기의 순간이 많으셨을텐데 언제나 이걸 어떻게 할까 상의하시지는 않았고, 홀로 짐을 짊어지고 살아오셨습니다. 일흔이 넘는 나이까지 작은 공장을 외국인 노동자 한명과 함께 꾸려오시다가 몇 해 전에 그만 두셨습니다. 3년전에는 위암진단을 받았는데 아주 초기라 간단한 복강경 수술 후 일주일만에 퇴원하셨습니다. 사실 실험적인 시술이었는데 암센터에 입원한 행운으로 받을 수 있었습니다. 일반적으로 위암은 아무리 초기여도 위를 절제한다고 하더군요. 그 후 6개월에 한번씩 정기적으로 검진을 받으시는데 지난 주에는 혈액검사에서 간수치가 정상의 열배가 넘어 아무래도 간암이 의심된다는 주치의의 말이 있었습니다. 초음파 검사를 하고 일주일 후에 와서 결과 보자고 하였습니다. 그 결과가 이번주 수요일에 나왔습니다. 아버지는 술을 많이 드십니다. 보통 하루에 소주 두병, 많이 마시면 세네병까지도 드십니다. 그런지가 아주 오래되었습니다. 아무래도 알콜 중독이라고 생각합니다. 주치의의 진단에 걱정이 되었는지 일주일을 참으셨네요. 저는 간암은 아니지 싶었습니다. 아버지 연세도 있고, 6개월 전까지 별다른 증상이 없다가 갑자기 간암이 발병되었을 것 같지는 않았습니다. 다만 술을 많이 마시니 탈이 났지 싶었지만, 그래도 신경이 여간 쓰이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수요일이 되고 부지런히 검진 시간에 맞춰 어머니께 전화를 드렸습니다. 아직 진료 전이라고 하시네요. 먼가 병원에서 착오가 있어서 다시 혈액 검사를 긴급으로 했다고 합니다. 결과는 초음파, 혈액 검사 이상 무. 다행입니다. 예상을 뒤엎지 않고 금요일에 다시 술을 드시기 시작했다고 하네요. 옆에서 가족들 건사하는 칠순 노모가 걱정입니다. 한평생 고생만 하셨는데 이제는 알콜 중독 남편 뒤치닥거리에 허리 펼 날이 없습니다. 그래도 아버지를 원망 할 수가 없습니다. 원망을 하다가도 그의 칠십년 인생을 돌아보면 나도 그렇게 살아 낼 수 있을까 하는 마음이 듭니다. 2015년에 글쓰기 수업에서 쓴 아버지에 대한 짧은 평전을 공유 할까 합니다.

안선진 평전

내가 못 한게 무어냐? 안선진이 늘 가족에게 입버릇처럼 하는 말이다. 1946년생, 올해 일흔의 평범한 노인은 나의 아버지이자 작은 공장을 경영하는 사업가이다. 남자는 늙으면 어린 아이같이 잘 삐친다더니, 술이나 한잔 들어가면 식구들을 귀찮게 하는 그의 하소연이다. 인천에서 태어난 안선진은 그의 나이 다섯에 전쟁을 경험한다. 십이 남매의 막내 쌍둥이 중 형으로 태어나 한국전쟁의 소용돌이를 버텨냈다. 열 두 명이나 되는 형제자매가 있었지만 전쟁과 가난으로 절반이 죽고 여섯만이 살아남았다. 전쟁 통에 아버지의 생사를 모르는 그는 어머니와 함께 의정부에 정착한다. 그 시대의 어머니들이 그랬듯이 온갖 노동을 감내하며 홀로 자식들을 길러내었다. 그의 어린 시절은 가난과 배고픔 그리고 사랑의 결핍을 피할 수 없었다. 소식이 끊겼던 큰형이 미군부대 군속으로 가족에게 돌아와 부대 물품을 팔아 가세가 피었던 시절도 있었지만 잠깐의 호사는 오래가지 못했고, 5남 1녀, 6남매는 늘 가난하게 살았다. 의정부 공고를 졸업한 그는 금성사(LG전자의 전신)에서 에스컬레이터를 만드는 일을 했다. 그의 세대에는 대학을 졸업한 사람이 많지 않았기 때문에 큰 기업에 취직할 수 있었다. 남다른 성실함으로 일본어를 배워가며 기술을 익혔다. 이후로는 정부 투자 기업으로 자리를 옮겨 중간 관리자로서 남부럽지 않게 중산층의 삶을 산다. 순탄한 삶에도 위기는 찾아 왔는데, 준공무원을 생활을 하다가 작은 민간 기업의 부사장으로 자리를 옮기고 나서였다. 쉰이 넘은 나이, 자존심 강한 그에게 나이 어린 사장과의 관계, 실적의 압박은 견디기 힘든 조건이었다. 일 년이 못되어 퇴사를 결심한다. 90년대 후반이었지만, 50대의 퇴직자가 설자리는 없었다. 집을 팔고, 이사를 하고 다시 팔고 이사를 했다. 대학원까지 진학한 장남과 학부를 다니는 둘째의 등록금, 그리고 네 식구의 생활비를 감당하기 위해 인생의 전성기에 일군 재산을 줄여 나갈 수밖에 없었다. 그의 첫 번째 사업은 일종의 사채업이었다. 급전이 필요한 사람의 자동차를 담보로 잡고 고리로 대출을 해 주는 일이다. 심성이 착한 중년의 남자는 얼마 못가 일을 접을 수밖에 없었다. 어지간히 모진 마음이 아니고서는 할 수 없는 일이 사채업 아닌가? 돈을 빌리는 사람 중에 딱하지 않은 사람이 없었을 게다. 그렇다고 사정 봐 줄 만큼 본인의 처지도 만만치 않았다. 자신이 하는 일을 “차차차”라고 부르며 유쾌히 하는 듯 했으나 금세 접었다. 기름밥 먹던 엔지니어에게 어울리지 않는 일이다. 그 후에는 지인의 소개로 만난 화학 분야의 제품을 만드는 사업에 뛰어든다. 한명이 투자를 하고 다른 사람이 만드는 기술을 갖고 있었고, 그가 경영을 했다. 25년을 전기분야에서 일하던 그가 화학제품을 만든다 하여 나는 의아했다. 당연히 1년이 지나도, 2년이 지나도 좀처럼 집에 돈을 가져 오지 못했다. 초기 자금을 댄 동업자가 먼저 나가 떨어졌다. 그리고 기술을 가지고 있던 사람이 떠났다. 하지만 그는 포기하지 않았다. 홀로 남은 그는 외국인 노동자와 함께 고된 육체노동을 감당했다. 3년이 되니 매출이 오르기 시작했다. 그렇게 꾸려 온 공장이 어느덧 십년이 넘었다. 일흔, 그는 여전히 현역이다. 어린 시절 가난을 떠 올리며 눈물 짖고, 청년과 중년의 성실함에 스스로 자부하면서도 눈물 흘리는 그는 감성적이다. 고등학교만 졸업한 것이 무에 부끄러웠는지 자식들에게 대졸이라고 감추기도 했다. 남에게 내세우지 못하는 둘째 아들이 속상하다. 그래서 그렇게도 “내가 못 한 것이 무어냐”고 목소리를 높인다. “네 그럼요. 다 잘 해 내셨습니다.” 지쳐 잠든 그의 얼굴에 한 말씀 드린다.

마치면서

어느 집이나 다 저마다의 사연과 어려운 점이 있겠지요. 저희 집은 그래도 행복한 축에 속한다고 생각합니다. 다만 어머니가 고생하셔서 걱정입니다만. 올 해는 어떻게든 아버지의 알콜중독과 그로 인한 어머니의 고생을 해결 할 돌파구를 만들어야 할 것 같습니다. 검진 결과가 나오기 전에는 아무 문제 없기만을 바랬는데 막상 문제 없다는 결과가 나오니 좀 힘이 빠집니다. 죽을 만치는 아니더라도 조금 이상이 있어서 수술도 간단히 하고 한두달 병원에 입원해서 강제로 술을 끊게 되기를 바랬는데 욕심이었지요. 참 건강 하나는 타고 나신 분인 것 같네요. 아버지 돌아가시기 전에 저도 아버지께 사랑한다고 말 할 수 있는 기회가 있기를, 그리고 아버지가 술에 취해서 하루 하루를 보내지 않고 이제 인생을 정리하면서 행복하게 사셨으면 합니다. 독자들 여러분의 가정에 행복과 건강을 빕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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